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즈타니 유타카 (문단 편집) === 인기 배우가 되다 === 약 2개월간의 [[가출]] 끝에 집으로 돌아온 미즈타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구하다 아역 시절 알게 된 TV 프로듀서로부터 "한가하다면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으로 또 드라마에 나가보지 않을래?"라고 전화가 오게 된다. 결국 1972년 20세에 연예계에 다시 복귀했다. 아르바이트 느낌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복귀 직후부터 연달아 출연 의뢰가 날아들었다. 당시 일본은 학원 드라마가 전성기였고, 수많은 학원 드라마가 제작되고 있었다. 미즈타니 역시 다양한 학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다. '뛰어나라! 청춘'에서 [[커닝]]에 빠져 들게 되는 학생 역을, '울지 마라 청춘'에서는 불량 리더 역을 맡았다. 학원 드라마 이외에는 형사 드라마 '[[태양을 향해 외쳐라]]'(1972년)의 제1화에서의 범인역도 맡았다. 이 작품을 다룬 [[니혼 테레비]] 프로듀서 오카다 신키치는 그를 발탁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알기 쉬운 악인이 아니라 복잡한 배경이나 인물상을 연기할 수 있는 젊은 배우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미즈타니 군을 기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젊지만 연기 솜씨는 뛰어났으니까요. [[https://www.news-postseven.com/archives/20211020_1699988.html?DETAIL|#]] '[[태양을 향해 외쳐라]]'에는 그 후에도 자주 범인역으로서 게스트로 출연해, 형사역의 하기와라 켄이치(萩原健一)[* 1960~70년대를 풍미한 당대 일본 연예계의 스타 중 한 명. 쇼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나 [[마츠다 유사쿠]]와도 공동 출연했다. 이때부터 마츠타 유사쿠와 절친해졌으며, 마츠다 유사쿠와는 첫 연기부터 의기투합해 틈만 나면 덩달아 놀러다녔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타 배우로서 눈부신 빛을 발한 하기와라 켄이치나 마츠다 유사쿠와 달리 미즈타니는 당시 전혀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YS9Z8xU0AE4GqN.jpg|width=100%]]}}} ||[[파일:a334ec2609162125b32f5a56a87fae3d94b52d00.26.2.2.2.jpg|width=100%]] || || {{{#fff ''''상처 투성이의 천사''''}}} || {{{#fff ''''열중시대''''}}} || 커리어의 반전을 만들어낸 작품은 1974년 하기와라 켄이치 주연의 드라마 '상처 투성이의 천사'다. 하기와라가 연기하는 아웃로의 탐정 키구레 오사무의 조사원 토오루 역으로 발탁됐다.[* 원래는 히노 쇼헤이가 이 역을 맡으려고 했으나 하기와라가 미즈타니를 추천해 발탁됐다.] 이 역할로 미즈타니는 인기가 급상승하게 됐다. 미즈타니는 한심함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 촌스럽고 멋없는 [[리젠트]]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오사무를 형처럼 흠모하는 한심한 깡패 같은 역할을 맡았다. 독특한 억양으로 "아니키(형님)~"이라고 말하며 하기와라를 따라다니는 불량배를 연기하며 코믹하면서도 고독을 느끼게 하는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주연 하기와라와 비등할 정도의 인기를 얻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미즈타니의 스타일을 따라 했다고 한다. 미즈타니는 2021년 [[https://mainichi.jp/articles/20210408/dde/012/200/014000c|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없으면 지금의 나도 없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미즈타니는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1975년에는 이시다 카츠무네(石田勝心) 감독의 영화 '도쿄만 화재'에서 [[테러리스트]] 역을 열연했으며, 1976년에는 깊은 이유 없이 우연히 부모를 죽여버린 청년의 당혹감과 고뇌를 그린 '청춘의 살인자'(하세가와 가즈히코 감독[* [[태양을 훔친 사나이]]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연출작은 2개밖에 안된다.], [[아트 시어터 길드|ATG]] 제작)에서 주인공 사이키 준의 불안한 내면을 훌륭하게 표현해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남우주연상을 24세에 최연소로 수상했다. 미즈타니의 연기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도 [[1970년대]] 일본 영화계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힌다. 또 1977년 드라마 '붉은 격류'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 역을 맡으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7.2%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붉은 격류' 이후에는 1978년 7월, [[닛폰 테레비]] 드라마 '나의 애처 이야기'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무려 10년만의 드라마 주연작이었다.[* 오오타케 시노부와 공동 주연.] 기세를 이어 1978년 10월에는 닛폰 테레비 드라마 '열중시대'의 단독 주연으로 출연했다. 초등학교를 무대로 당시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한 교육현장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교사들의 모습을 담은 드라마였다. 미즈타니가 맡은 역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인 성실하고 강직한 초등학교 신입교사였다. 열혈한으로 턱없이 밝은 교사를 연기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시청률은 방송 시작 3일 만에 20%를 넘었고 13회의 30%를 넘었으며, 최고 시청률은 40.0%[* 역대 민방 최고 시청률 5위. 닐슨 기준으로 46.7%라는 고시청률.]를 기록했다. 미즈타니가 맡은 교사 키타노는 '이상의 교사'로서 사회 현상이 됐으며[* 이 작품의 성공으로 '[[3학년 B반 킨파치 선생님]]' 등 교사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학원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그의 홋카이도 사투리가 섞인 말투가 유행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으로 미즈타니 유타카는 지금까지 많이 연기해 온 [[아웃사이더]]나 어딘가 모르게 그늘진 이미지를 불식시켜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이후 활동의 폭을 넓혀 1979년 방영된 형사 드라마 '열중시대 형사편'에서는 주연을 맡을 뿐만 아니라 주제가도 불러 가수로서도 성공을 거뒀다. 미즈타니가 부른 노래인 '[[https://www.youtube.com/watch?v=D1CcVBpXafk|캘리포니아 커넥션(カリフォルニア・コネクション)]]'이 [[오리콘 차트]]에서 4주 연속 1위를 거뒀으며[* 1979년 오리콘 연간 차트에서는 12위를 기록.], 판매량도 65만장의 히트를 기록한다.[* 발매 이후 29년 후인, 2008년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열창하기도 했다.] 드라마도 최고 시청률 32%를 기록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영화보다는 드라마 위주로 출연했는데, 1982년 '안짱'[* 이 작품에서 현재의 배우자 이토 란과 공동 출연한다.], 1983년 '사건기자 차보!', 1987년부터는 '아사미 미츠히코 미스터리'(모두 니혼 테레비 계열) 같은 작품에 주연을 맡았다. 세 작품 모두 높은 시청률을 획득해 인기 배우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81년에는 이치카와 곤 감독[* 1976년판 [[이누가미 일족]]으로 유명하다. 쇼와 시대의 거장 감독 중 한 명.]의 영화 '행복'의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5년만의 영화계의 복귀했으며,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이 작품 출연 이후 27년동안 영화를 찍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